<다시 태어나도 우리한줄 관람평


이지윤 | 하얀 눈처럼 쌓이는 인연, 다시 태어나도 우리 그 위에서

박범수 | 인간이 숭고해지는 영화적 진실성에 대해 생각하다

조휴연 | 태어날 곳은 선택할 수 없지만, 삶은 만들어갈 수 있다

최대한 | 아홉 살 린포체의 무게감과 참된 스승의 헌신이 애잔하다

김신 | 내 작은 나무는 바람을 사랑했네. 정처 없는 바람을. 바람의 집은 어디인가. 바람의 집은 - 포루그 파로흐자드

남선우 | 우리는 모두 정해진 삶과 정해야 하는 삶 사이를 헤맨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리뷰: 인간이 숭고해지는 영화적 진실성에 대해 생각하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환생한 티베트 수도승 ‘린포체’로 지명된 소년 ‘앙뚜’와 그의 늙은 스승 ‘우르갼’의 삶을 담은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는 내내, 스치는 당혹감에 자리를 계속 고쳐 앉았다. 작가의 개입과 허구적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이 피사체를 대하는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라는 평소의 생각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두 개의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원에 두 명의 린포체를 들일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앙뚜가 쫓겨나자 우르갼은 앙뚜가 전생을 살았던 티베트의 캄으로 그를 데려가기로 결심한다. 캄 인근의 국경 도시에서 둘은 매점을 운영하는 중년 여인을 만난다. 여인이 캄에 가려는 이유를 묻자 우르갼은 앙뚜의 정체를 알린다. 여인이 절을 하고 린포체는 여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한다. 의문점은 앙뚜가 린포체임을 알리는 우르갼과 앙뚜에게 절을 하는 여인이 하나의 연속된 쇼트가 아닌 쇼트-리버스 쇼트로 처리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편집이라는 허구적 조작을 실재의 기록에 개입시킨 하나의 결단이다. 그렇다면 그 결단은 무엇을 향하는가. 우르갼의 말과 여인의 절 사이에 존재했을 간극은 과연 무엇일까.


분절된 쇼트는 이후에도 등장한다. 앙뚜와 우르갼의 사정을 알게 된 어느 사원에서 앙뚜에게 린포체 교육을 제공하기로 하자, 우르갼은 자신의 소임이 다했음을 깨닫고 작별을 고한다. 우르갼이 눈물을 흘리지만 앙뚜는 당면한 상황을 애써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일 뿐이다. 앙뚜의 눈물이 등장하는 것은 그 다음 쇼트이다. 우르갼과 앙뚜의 눈물에는 분명한 시차가 있다. 그 시차를 생략해버린 결단은 매점에서의 쇼트-리버스 쇼트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다큐멘터리가 작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말은 형용모순을 안고 있다. 현실에 특정한 구도의 프레임(혹은 카메라)을 가져다 대는 순간, 현실은 그 프레임에 따라 해석되고 보여지기에 모든 관점에서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객관성은 결코 확보될 수 없다. 다큐멘터리 작업에 작가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것도 바로 프레임의 주체가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란 결국 작가라는 주체의 인식을 기반으로 실재에 최대한 가깝게 재구성된 현실의 모사인 셈이다. 그러나 모사가 곧 진실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단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주체의 인식에 따라 현실이 재구성된다는 말은 하나의 현상을 두고 주체의 수만큼 서로 다른 진실들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다큐멘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은 그 진실성을 획득하기 위해 현실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 지를 정확히 아는 선구자들이었다.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알려진 로버트 J. 플래허티 감독의 <북극의 나누크>(1922)는 가장 유명한 예시일 것이다. 플래허티는 캐나다 북부에 거주하는 이누이트 족의 일상을 담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연기를 요구했다. 실제로는 바다코끼리 사냥에 총을 사용하던 이누이트들이 그의 뜻에 따라 작살을 꺼내든 것이다. 플래허티는 스스로와 관객 모두를 기만한 것일까? 그보다는 플래허티가 중요하게 여긴 진실이 기계적으로 기록된 이방인의 생활상 그 자체가 아닌, 유럽과는 상이한 환경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적응해 살아가는 비유럽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그리즐리 맨>(2005)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도 눈 여겨 볼 만 하다. 알래스카의 곰들과 어울려 살다가 결국 곰에게 잡아 먹힌 환경운동가 티모시 트래드웰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에서 헤어조크는 나레이션과 인터뷰를 활용해 트래드웰의 삶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트래드웰의 행적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에 그쳤더라면 <그리즐리 맨>은 지구의 암적 존재인 인간의 횡포에 맞서 곰들을 지켜내고자 했던 어느 낭만주의자의 비극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어조크의 개입은 약육강식이라는 비정한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망상가로서의 이면을 들추어낸다. 헤어조크가 밝혀내고자 했던 진실은 트래드웰이라는 인간과 그 사상의 본질이 아닌, 그의 삶이 내포한 인간 존재의 태생적 다층성과 다면성이었다.


다소 우회한 이야기를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두 수도승을 대하는 태도로 끌어 와 생각해 볼 차례다. 영화의 전반에 짙게 깔려있는 종교적 숙명은 앙뚜와 우르갼의 서사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영화가 그 숙명에 앞서 줄곧 주목하는 지점은 아이와 노인이 영위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나날들이다. 노인들의 머리를 매만지던 앙뚜는 린포체이기에 앞서 또래들과 뛰어 놀고 싶은 한 명의 어린이다. 앙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앙뚜의 불안을 가장 잘 이해하고 달래주는 존재는 바로 우르갼이다. 중생들을 다스리고 이끌어야 할 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조언하기도 하지만, 앙뚜를 먹이고 재우면서 공부를 게을리할 때마다 꾸지람을 내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할아버지와 손주의 관계다.


일상의 먹고 사는 문제가 전면에 등장할 때, 영화는 헤어조크의 인터뷰가 트래드웰의 삶에 개입한 것처럼 인물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간다. 상자에 지폐를 넣는 우르갼의 손과 난로에 기름을 붓다가 불을 낼 뻔한 앙뚜의 손을 포착하는 클로즈업은 영적 지도자들을 더없이 인간적으로 보이게 한다. 쇼트-리버스 쇼트의 결단도 어쩌면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거리까지도 줄임으로써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한층 부각시키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인간적인 것들에 대비되는 초월적이고 지고한 것들은 더없이 먼 곳에서 인간을 굽어본다. 티베트인들의 성산(聖山)인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의 고봉들, 윤회를 끊기 위해 갠지스 강어귀를 밝게 물들이는 화장의 불길, 하늘의 별 대신 무수히 빛나는 도시의 조명들은 속세의 번뇌와는 한참 떨어진 별세계처럼 보인다. 그 별세계를 지나 온 앙뚜와 우르갼의 여정이 방점을 찍는 순간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헤치고 캄으로 향할 때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위를 걷던 앙뚜가 힘이 들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하자 우르갼은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다독인다.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이동은 무리였기에 우르갼은 앙뚜에게 소라나팔을 불게 한다. 소리를 듣고 캄의 수도승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찾아오지 않고 조우는 실패한다.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진실을 위한 조작’을 수행했던 플래허티의 카메라를 떠올리게 한다. 초월적인 것들은 시야에서 사라졌고, 카메라는 모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심한 롱 쇼트로 육체적 한계에 다다른 앙뚜와 우르갼을 포착한다. 종교적 숙명의 무게보다 당면한 인간적 고통이 부각되는 순간, 롱 쇼트는 오롯이 둘만을 포착함으로써 눈물의 쇼트-리버스 쇼트에 비할 수 있는 어떤 진실에 다가간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은 종교 없이 인간 그 자체를 숭고하게 다룰 수 있다고 믿는 휴머니즘이다. 영화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앙뚜와 우르갼에게서 운명의 굴레를 한 꺼풀 벗겨내 언 땅에 굳게 두 발을 딛고 선 인간을 보여준다. 종교라는 주제를 손쉽게 답습하는 대신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적극적으로 진실을 찾아내려는 태도는 형식에 대한 교조적 태도를 넘어 큰 울림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성이야 말로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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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장한줄 관람평


이지윤 | "보세요, 똑같은 인간입니다. 단지, 이 세상이 비극입니다."

박범수 | 타인에 대한 이해, 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수사에 대하여

조휴연 | '이해한다'는 말의 무게

최대한 | '이해'라는 의미에 대한 잔잔한 파장, 진정성에 대한 의문

이가영 | 자신의 정체성이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는 고통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나

김신 |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어쩌면 배우의 운명론

남선우 | 스토리가 새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주인공과 관객을 함께 윤리적 심판대에 올려 놓는다





 <분장> 리뷰: '이해'라는 의미에 대한 잔잔한 파장, 진정성에 대한 의문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대한 님의 글입니다.




남연우 감독이 연출한 <분장>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된 이후 많은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올 가을, 극장 정식 개봉을 통해 대중들에게 찾아왔다. <분장>은 이전까지 <가시꽃>(2012) 등의 작품에서 배우로 익숙했던 ‘남연우’라는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무명 연극배우 ‘송준'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송준의 일상은 쉽지가 않다. 매번 오디션에 떨어지고 우연히 치킨집에서 만난 선배로부터 ‘재능이 없으면 포기해야한다’는 말을 듣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굴욕을 버텨내고 ‘다크라이프’라는 성소수자를 다루는 연극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진정성 있는 연기를 위해 성소수자에 관한 영상들을 찾아보고 성소수자인 '이나'를 직접 만나 그녀의 삶에 대해 묻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덕분일까? 송준은 ‘다크라이프’의 주연을 얻게 된다. 성소수자를 이해하게 된 그는 진정성 있는 연기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고 스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동생 ‘송혁'과 절친한 친구 ‘우재’의 섹스를 목격하고 충격에 빠지고, 성소수자를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과 친동생에 대한 모멸감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그의 삶은 망가져간다.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남연우'


영화 <분장>의 관전 포인트 하나를 꼽자면 남연우 감독이 느낀 무명 배우로서의 삶이 디테일하게 송준에게 투영되어있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부 송준의 모습에서 남연우 감독의 무명 시절이 얼마나 고됐을 지 추측된다. 송준이 겪는 이 일련의 시련들은 남연우 감독이 직접 겪은 시련일 것이다. 이 시련은 ‘다크라이프’의 ‘안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남연우’를 만들었다. 





'이해'라는 의미에 대한 잔잔한 파장


<분장>은 이전까지의 퀴어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의 퀴어 영화는 성소수자를 담담하게 보여주거나 옹호, 지지하는 방향성을 가지곤 했다. 또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분장>의 주인공인 송준은 중반까지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섹스를 목격한 이후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분장>은 ‘이해’라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잔잔한 파장을 만들었다. 관객들 앞에 보여지는 송준은 성소수자인 ‘안나’를 연기해야한다. 그는 연기를 위해서 진심으로 성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관객들 역시 송준이 성소수자를 진심으로 연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남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인 것이다. 자신의 친동생이 성소수자인 것을 알게 되자 ‘이해’는 ‘위선’이라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분장>은 관객들에게 ‘이해’라는 의미에 대해 날카롭게 의문점을 제기한다.





진정성에 대한 의문


최근 한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서 ‘작가’와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영화’와 ‘작가의 삶’이 일치했을 때 영화에 ‘진정성’이 생기고, 그것이 진짜 ‘영화’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나눴다. 이 대화를 나눈 후에 영화를 보는 시각이 조금은 변화했음을 느꼈는데 <분장>을 보면서 가끔 ‘진정성’에 대해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존재했다. 


동생 송혁과 친구 우재의 동성애는 섹스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영화에서 관계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랑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섹스만으로 둘의 관계가 구축되어있다. 또한 둘의 섹스는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고 파격적이다. 둘의 섹스를 목격한 송준은 마치 심판자인 것처럼 둘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벌을 주고 둘을 죄인으로 만든다. <분장>은 어떤 측면에서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기도 하다. 남연우 감독이 그들의 입장을 생각했다면 과정 없는 섹스로 그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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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땐뽀걸즈한줄 관람평


박범수 | 마냥 엄혹할 것 같은 그곳에도 꿈꾸는 아이들의 경쾌한 스텝이 있다

조휴연 | 원하는 '것들'을 가져보기 위해

최대한 | 소녀들에게 선생님은 노력의 결실을 제시했다

이가영 | 막막한 현실에서 회상할 추억이 있다는 든든함

김신 |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법한 올해의 무표정이 여기에 있다

남선우 |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마음을 돕는 사람들.






 <땐뽀걸즈> 리뷰: 원하는 '것들'을 가져보기 위해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휴연 님의 글입니다.




“내가 원하는 걸 두 개는 못 가지는 거잖아요”


땐뽀(댄스 스포츠)반의 ‘현빈’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게 됐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시작한 댄스 스포츠 동아리에 재미를 붙여 활동을 하고 있지만, 마음껏 몸을 던져 연습하기는 힘들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텝을 밟아보는 게 현빈이 할 수 있는 나머지 연습이다. 하지만 친구들한테 그런 사정을 모두 이야기 하기는 힘들다. 연습이 잘 되지 않아서 친구들과 갈등이 생기면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고 학교를 빠진다. 현빈의 경우 땐뽀반에 더 마음을 쏟을수록 '하나쯤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이 커진다. 취미를 마음껏 누리기에 생활은 팍팍하지만, 춤이 재미있고 선생님과 친구들과 있으면 즐겁다. 현빈의 상황을 알게 된 선생님은 네 잘못이 아니다’라거나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라고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현빈이 조금 더 ‘땐뽀’에 마음을 쏟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빈을 비롯해 거제에서 여상에 다니는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일터로 나가게 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학교와 가정과 지역이라는 울타리는 아이들로 하여금 먹고사는 문제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나 선생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승진을 포기하고 땐뽀반을 맡아 가르치는 선생님의 존재는 영화를 떠받치는 큰 기둥처럼 느껴진다. 많은 어른들과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항상 아이들과 같이 웃고 떠들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선다. 학교 바깥에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춤을 출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현빈을 포함한 땐뽀반의 아이들은 다르다. 춤을 추며 더 많이 웃고, 더 열정적인, 능동적인 사람이 된다. 





<땐뽀걸즈>는 고등학교 시절 즐거운 추억으로 남게 될 동아리 활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땐뽀반 아이들은 동아리 활동을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취업을 앞두고 있거나 가족의 해체를 경험했거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은 삶에서 하나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는 게, 가질 것을 꿈꾸는 게 사치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땐뽀걸즈>는 아이들의 입과 표정, 행동을 통해 '그럼에도 꿈꿔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일' 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말미, 얼마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무사히 대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하는 동안 현빈의 얼굴이 땐뽀반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은 그래서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원하는 ‘것들’을 가져보려는 노력이 작은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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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배우는 오늘도한줄 관람평


이지윤 | 오늘도 달리는 여배우, 그리고 여성

조휴연 | 기술자의 성공적인 창작자 데뷔

최대한 | 문소리의 진솔하고 유쾌한 고백. 성공적인 감독 데뷔

이가영 | 솔직함이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과정

김신 | 문소리의 목소리에 대한 영화

남선우 | '여배우는 오늘'이 아닌 <여배우는 오늘'도'>를 찍어야 했던 이유






 <여배우는 오늘도> 리뷰: 문소리의 목소리에 대한 영화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신 님의 글입니다.




1.  

3부작으로 구성된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부각되는 챕터는 ‘최고의 감독’이라고 제목 붙여진 마지막 세 번째 장일 것이다. ‘소리’는 14년째 새로운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영면한 한 무명감독의 장례식장에 참석한다. 부조금만 전하고 빠져나오려했던 식장에서 우연히 배우인 동료와 후배를 마주치며 술잔을 기울인다. 대화가 진행되던 와중에 난데없이 예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며 고성이 오고가고, 소리는 잠시 자리를 피해 들어간 방안에서 무명 감독의 아들과 함께 감독이 생전에 촬영했던 영상들을 감상한다. 영상을 보던 소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몇몇 이들에게 이 장면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면 소리가 울음을 터뜨리게된 전말이 극중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1부와 2부를 거쳐오며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사실적인 보고서를 자임했던 영화의 톤은 3부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굴절한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글의 말미에 이르러 별도의 해석을 할당할 수 있을 것 같다. 





2.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을 수료하며 문소리는 2014년과 2015년에 거쳐 세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그 작품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문소리의 데뷔작이다. 서술어가 생략되어있는 제목의 공란에 기입될 여배우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고고한 아우라와 원색의 드레스로 치장하고 레드카펫을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통념적인 여배우의 이미지일까. <여배우는 오늘도>는 다른 길을 택한다. 여성혐오가 공중의 화두로 부각된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재현물이 박스오피스를 점령한 시대에 문소리는 소셜미디어와 옴니스코프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들의 절시증을 자극하는 환상담을 제공할 생각이 없다. 대신 여배우라는 환상의 이면에 자리한 인간 문소리의 소탈한 고백이 주를 이룬다. 주인공인 소리는 술자리에서 원치않게 동석한 남성들로부터 발설되는 저속한 농담을 견디고, 여배우이기에 매일 드레스를 입을 것이라는 주변인들의 왜곡된 환상에 둘러싸여 산다. 심지어 친구들과 가족들도 언제나 그에게 여배우라는 호칭을 부과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소리의 일상에는 어딜가나 ‘여배우’라는 수식어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배우는 오늘도>에는 위와 같은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비단 극중의 상황으로만 인지되지 않고 새삼스럽지 않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여성이기에 영화계에서 모멸감을 당했어야했던 많은 이들의 증언이 도처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영화 외적 상황이 우리의 지각에 은밀하게 스며들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비단 '영화계 내 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로 불거진 근래의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잘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여배우는 오늘도>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극중 소리의 일상은 여직원, 여선생, 여류작가등 여성이기에 들러붙는 수많은 멸칭을 달고 살아야하는 이들의 일상과도 공명하는 많은 지점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배우는 오늘도>가 비단 여배우에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여성을 특정한 이미지로밖에 상상할 수 없게된 한국사회의 환부를 까발린 투시도라고 생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한 편으로 투시도라는 단어는 양의적이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의 민낯을 투명하게 내비치고자 하는 영화의 기획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 주제의식을 전하는 영화적 형식미를 요약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특기할 수 있을 법한 장면이 있다. 2부의 어느 순간. 고급스러운 실크 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리며 부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을 거니는 소리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방영된다. 그 모습을 안방에서 감상하며 즐거워하는 소리의 딸앞에서 소리는 입술을 앙다물며 텔레비전으로 다가가 전원을 끈다. 일상적인 톤으로 진행되는 영화에 과한 해석을 덧붙이는 것이 현명한 길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이 장면에서 텔레비전 속 소리와 안방의 후줄그레한 소리의 모습 사이의 괴리는 의미심장하다. 그 영상의 괴리는 바로 전 장면까지 소리가 여배우이기에 착용해야했던 선글라스, 짙은 화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리를 둘러싸왔던 여배우의 가장된 이미지들과 한데 엮이며 유사한 형상의 계열을 형성하고 있다. 결국 화면을 끈다는 소리의 행위는 항상 여성들이 왜곡된 이미지로 대상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담아낸 이 사회의 투시도를, 그리고 추가적으로는 감독과 관객의 시선에 복속되어 정해진 역할만 연행해야 하는 배우의 존재론을 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하는 문소리의 감독 데뷔에 대한 메타적인 진술을 전경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장난을 조금 해보자면 <여배우는 오늘도>를 곧 '문소리의 목소리'에 대한 영화라 요약하고 싶다.  





3.  

첫 문단에서 간략하게 말한 영화의 세 번째 장을 상기할 차례다. 장례식장에서 소리는 무명감독이 생전에 촬영한 영상들을 모아보는데 그 영상들은 감독 개인의 영화들도 아닐뿐더러 작가주의적인 자질이 빛나는 특별한 클립들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대신 그것은 감독이 촬영한 가족들의 일상적인 모습들, 그리고 곳곳의 여행지에서 긁어모은 서정적인 이미지들의 콜라주다. 그 화면이 투영되는 벽으로 카메라가 트래블링하더니 어느새 그 영상이 <여배우는 오늘도>의 화면이 된다. 이윽고 그 화면을 바라보는 소리의 붉은 눈시울에서 울음이 터져나온다.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도약하는 이 실험적인 화면도 당황스럽지만 그 당황스러움을 배가하는 요소가 있다. 바로 극중에서 장례가 치뤄지고 있는 감독의 정체가 모호하다는 사실이다. 문소리 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인물들이 이전까지 극중에서 실제 자신을 연기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더더욱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영화가 선글라스와 텔레비전과 같은 스크린 이미지를 동원하며 한 인물의 존재론적 괴리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단서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단서에 기반해서 추측하자면, 어쩌면 (배우-문소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제작한 작품으로 스스로가 정체화되곤 하는 한 영화감독이 남긴 희소한 사적 영상에서 우리는 우연히 그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발견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화면을 촬영한 감독이 익명의 예술가의 정체성으로 모호화될 때, 우리는 그들의 고뇌를 기억하려는 문소리의 고별사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 화면이 영화의 스크린으로 확장하면서 문소리의 시점과 포개질 때, 감독 문소리는 감독 데뷔에 대한 스스로의 불안을 자의식적으로 내보인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모호함이 영화의 균질한 톤을 깨트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말해서 여기에서 우리는 감독 문소리의 작가주의적인 행보를 고대하게 만드는 여지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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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사랑한줄 관람평


이지윤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조휴연 | 예술가(이고 싶은 사람)의 일상이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최대한 | 시와 제주, 그리고 진정성과 유머러스함

김신 | 시적인 영화가 되고 싶었던 시인의 영화

남선우 | 슬픔, 그 사랑의 효용







 <시인의 사랑> 리뷰: 네 마음의 쓸모




*관객기자단 [인디즈] 남선우 님의 글입니다.



고즈넉한 제주의 풍경이 담긴 영상 위로 시를 읊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메라가 그의 목소리를 쫓아 숲도 바다도 아닌 ‘곶자왈 문인 합평회’가 열리는 카페에 도착한 순간, 관객은 남자의 시가 비평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애 없이 부른 꽃노래라며 남자의 시는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영화는 시인 현택기(양익준 분)가 처한 문제 상황을 첫 장면에 바로 보여준다. <시인의 사랑>은 슬픔이 부족한 시인이 슬픔을 만나 헤매는 이야기이다.





현택기는 시인이지만 시를 잘 쓰지 못 하고, 시인이라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시인인 것과 별개로 정자도 별로 없다. 방과 후 글짓기 교실 아이들에게는 시인인데 왜 뚱뚱하냐는 소리를 듣는데, 초등학생들에게까지 현택기라는 사람은 ‘어쩌다 등단을 하게 된 시인’이라는 특이사항 외에는 그다지 눈에 띌 것이 없는, 오히려 어딘가 조금 비어보이는 사람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택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시인이라는 자의식만큼은 뚜렷하게 갖고 있어서 언제고 시를 쓰려 노력한다. 그러나 욕심만큼 괜찮은 시를 짓게 해 줄 전환점은 그를 찾아오지 않고, 그는 절망한다.


전환을 갈망하다 뻗어버린 택기에게 아내 강순(전혜진 분)은 도넛을 사다 준다. ‘뉴욕의 맛’이라며 익살을 떨어도 쳐다보지 않던 택기가 아내의 강요에 못 이겨 둥근 빵의 맛을 보게 되면서, 희한하게도 그의 삶에 전환이 찾아온다. 달콤한 맛에 이끌려 하루가 멀다 하고 도넛 가게로 뛰어 다니고, 그러다 만난 ‘함부로 아름다운 것’에 눈길이 꽂혀 지어본 적 없는 미소를 짓게 되고, ‘그 어린 것의 고통에 내가 가진 것을 하나 둘 내놓게 되’는 택기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시를 쓴다. 그에게서 곶자왈 문인들이 보고 싶어 했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리얼 월드’. 그 세계에서 아무도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지만, 소년을 만나 ‘슬픔이 재료가 되는’ 시를 쓸 줄 알게 된 택기를 보며 관객은 ‘이것이 시인의 사랑이구나’하고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이 끄덕임은 제목과 영상을 짝짓는 데에 성공했다는 안도의 표시에 그친 것일 수 있다. ‘현택기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 ‘시인의 사랑’ 세윤(정가람 분)이 어떤 캐릭터로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떠올려야 한다. 세윤은 방에서 투병 중인 아버지,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약간은 반항적인 소년이다. 학교를 그만뒀다는 언급이 있지만, 그가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종종 또래 한 무리와 술을 마시며 화장실에서 은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만한 사이의 여자 친구가 있다. 그렇게 방황하는 와중에 기회만 생기면 자신을 돕는 시인 택기를 만난다. 이야기 안에서 관객이 세윤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는 이 정도이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말로 뱉지도, 택기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표현하지도 않는 세윤은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대사가 몇 번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애정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닌 불운에 지친 아이의 안타까운 외침으로 들려온다.





세윤에 대한 정보의 결핍은 도리어 관객을 블랙 코미디의 국면으로 몰고 간다. 사실 택기는 세윤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택기 자신에게 없는 결핍을 쫓았을 뿐이라고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택기가 세윤에게 끌리고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인식하는 지점이 화장실 장면이 아니냐며 슬픔에 대한 갈망 이전에 성적인 끌림이 선행했다는 점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을 ‘시인의 사랑’이 시작된 상황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본 적 없는 택기가 자신이 양성애자일 수도 있음을 견지하게 돕는 서사적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화장실 이후의 떨림을 친구에게 털어놓고,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양성애자일 거라고 아내에게 말하는 택기를 영화는 스치듯 비추고 만다. 끝내 이 영화가 찾아 헤매는 것은 ‘슬픔’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문밖에 있다가 도망을 갔’다고, ‘슬픔은 시인이 시를 쓰는 재료’라고, ‘슬픔이 말라’간다고. 여러 차례 슬픔을 부르짖는 대사들이 다소 노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영화는 택기가 슬픔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준다. 택기가 아내 강순에게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또한 이 맥락에서 의미심장하게 읽을 수 있다. 택기는 어떤 여자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때 자신이 힘들었노라고 회상한다. 그러면서 어쩌면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그 여자가 아니라 그때의 슬픈 마음일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택기는 왜 그런 사랑을, 그때보다 더 복잡해진 상황(결혼한 상황, 처음으로 남자를 좋아하게 된 상황)에서 반복하는가. 결국 영화의 ‘최종보스’는 슬픔도 사랑도 아닌 ‘시’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답은 쉽게 구해진다. 소년이 처한 상황의 슬픔에서 자신의 구애에 응답 없는 소년을 인내하는 슬픔으로 재료를 달리하면서 시인은 계속해서 시를 쓴다.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생의 한 가운데에서 슬픔이 필요했던 시인이 꾸역꾸역 이어간 사랑의 행보는 그렇게 시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쓸모가 있었다. 대답 없던 네 마음은 할 일을 다 했다. 시를 남겼기 때문에. 시밖에 남기지 못 했기 때문에.





선택적 슬픔과 효용적 사랑이라는 블랙 코미디 상황을 시인의 소명과 연결시킨 예민함에는 아쉽게도 지구력이 부족했다. <시인의 사랑>은 후반으로 가면서 초반의 위트를 잃고 블랙 코미디를 실현하지 못한다.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닌 현실적인 이야기로 테마를 끌고 가려 했지만, 전형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었기에 주변 인물들이 점차 기능적으로 활용되고 만다. 할 이야기가 많이 남은 것 같은데도 영화가 만년필의 촉 대신 뭉뚝한 연필의 심을 골라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창작자 혹은 예술가로서의 결핍을 느낀 이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가본 적 없는 생의 이면에 도달하려는 설정은 예술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다. 최근에 이 소재를 가장 극적으로 활용한 영화로 <블랙 스완>(2010)과 <위플래쉬>(2014)가 대표적이다. 예술가 영화는 아니지만 <캐롤>(2015)이 <시인의 사랑>과 유사한 인물구도를 어떻게 그려내고 결말을 끌어가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들과의 비교는 <시인의 사랑>이 가진 미덕과 허물을 선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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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히어로한줄 관람평


이지윤 | 한 마디의 말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박범수 | 지친 아버지를 말없이 보듬는 가족이라는 이름

조휴연 | 7년이 지나고 나서 아이는 '평범한 회사원'을 꿈꾸게 됐다. 아이의 아버지 때문이 아니다.

최대한 | 너무나도 이르게 '현우'를 어른으로 만든 세상이 밉다

김신 | 투쟁의 현장 이면에서 발견한 사려깊은 시선

남선우 | 소년, 세상의 '어른'(들)을 만나다






 <안녕 히어로> 리뷰: 한 마디의 말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채워오라고 한 생활기록부 조사용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아빠의 직업을 적는 칸 앞에서 고민한다. 사회운동가, 해고자, 노동운동가.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르지만 딱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한다. 아빠는 결국 스스로의 직업을 ‘노동운동가’라 적는다. 장래희망에 대해 적는 칸 앞에서도 고민한다. 지도자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아빠는 지도자라는 단어가 너무 포괄적이라 말한다. 고민 끝에 현우는 조사용지에 ‘CEO’라는 단어를 연필로 꾹꾹 눌러 적는다.





<안녕 히어로>는 2009년 진행되었던 정리해고에 맞서 7년이 넘는 시간동안 노동운동을 이어온 김정운 씨 가족의 일상을 담아낸다. 작품은 김정운 씨가 아닌 아들 현우의 시선으로 잔잔하게 흘러간다. 노동과 해고, 투쟁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어릴 적부터 목격한 복직 투쟁의 현장. 아버지의 징계구속으로 인해 주눅이 들어있었던 사춘기. “아빠가 해낼 줄 알았어”라 말하며 아빠를 이해하게 된 순간까지. 주변부에 서있는 노동자 가족의 시선으로 긴 시간의 흐름이 차곡차곡 정리된 작품은 노동 투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끔 만든다. 특히 그 시선이 아이의 것이라는 점에서 드러나는 성장의 흔적은 보는 이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려 깊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현우는 아빠의 상황을 지켜보는 자신의 이해와 감정을 담담하게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때로 현우는 길게 침묵하기도 하고 어딘가를 조용히 응시하며 눈을 깜빡이기도 한다. 카메라는 현우의 그런 침묵을 방해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현우를 고요히 바라보는 카메라는 현우가 지닌 공기와 표정 속에 담긴 정서를 작품 속으로 흡수시킨다.





그런 카메라의 시선은 아빠 김정운 씨와 현우의 관계와도 닮아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밝히기 위한 5년간의 법정 싸움에서 패소한 날, 현우와 동생은 TV를 통해 재판이 끝난 현장을 지켜본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아빠는 쓰라린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족발과 카스테라를 들고 온다. 현우와 동생은 아빠에게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대신 ‘아빠 TV 나온 거 봤어’라 말하며 히히 웃는다. 아빠도 아이들의 장난에 웃음기 띤 몇 마디의 말을 건넨다. 엄마와 함께 아빠의 연설을 들으러 갔을 때도 그렇다. 현우는 아빠에게 다가가는 대신 휴대폰으로 연설 중인 아빠의 모습을 오래도록 찍고 미소를 띤 얼굴로 아빠를 바라본다. 연설이 끝난 후 현우는 아빠에게 다가가 ‘아빠 마이크 드니까 목소리가 왜 그렇게 바뀌었어?’라며 장난을 친다. 또 다시 장난스러운 몇 마디가 오간다. 이처럼 현우와 아빠는 겉으로 드러나는 위로의 언어를 건네기 보단 시선으로 위로를 하고 분위기로 대화를 나눈다. 마치 그런 그들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처럼 말이다.



현우는 아빠의 세상을 이해한다. 눈에 띄는 당장의 변화가 없었음에도 긴 시간동안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모습이 대단해보였다 말한다. 그런 아빠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현우에게 찾아든 것은 바로 세상이 가진 경사에 대한 자각이었다. 현우는 세상이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를 너무도 일찍 깨달아버렸다. 조사용지에 적힌 ‘CEO’라는 글씨와 높은 사람에게 붙어있는 처세가 필요한 세상임을 알았다는 목소리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어떤 먹먹함이 들게끔 만든다.





<안녕 히어로>는 쌍용자동차 투쟁이 현재진행형의 것임을 드러내며 마무리된다. 아직 130명의 복직 대기자들이 남아있다. 끝나지 않은 투쟁에 대한 문제 제기와 동시에 <안녕 히어로>가 드러내는 것은 현장에서 길고도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다. 작품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기보단 분위기로 감정을 주고받는 것, 한 마디의 말보다 따뜻한 시선이 연대와 소통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안녕 히어로>가 보여주는 이런 자세는 어쩌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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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파이널 컷한줄 관람평


박범수 | '바보 노무현'의 꿈을 이을 수많은 무현들을 위하여

조휴연 | 우리는 도전하려는 사람을 팔짱 끼고 바라보지는 않았나

이가영 |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들의 도전

김신 | 붉은 눈시울, 회한의 술잔으로 구가하는 표상(실재가 아니다)의 강신술. 그 자체로 2017년 한국을 관류하고 있는 어떤 징후.

남선우 |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있어. 자신이 잊은 걸 상기시켜주니까.” (<라라랜드> 중)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파이널 컷> 리뷰: 잊은 것들을 위한 기억




*관객기자단 [인디즈] 남선우 님의 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있어. 자신이 잊은 걸 상기시켜주니까.” 

(People love what other people are passionate about. You remind what they forgot.)

-영화 <라라랜드> 중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파이널 컷>을 보고 극장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어두운 파랑이 되어있었다. 그 어두운 파랑이 보라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엉뚱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영화의 대사를 떠올렸다. 그 하늘을 닮은 빛깔을 뽐내던 영화 <라라랜드>(2016)의 대사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열정에 끌린다는 말. 그리고 열정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의로운’ 혹은 ‘꾸밈없는’ 등의 형용사를 붙여도 좋을 것이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파이널 컷>은 두 ‘무현’의 열정에 관객들이 끌리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는 무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총선 도전기를 교직하여 만든 다큐멘터리다. 화자인 작가 김원명이 2000년 부산의 노무현과 2016년 여수의 백무현을 찾아 나선다. 역사가 스포일러인지라 이들의 도전이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도전의 과정에서 두 무현이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는지 지켜볼 수 있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볼 수 있다. 곪아 있는 세상 한 구석을 바꿔보겠다고 달려가는 그들의 열정에 끌려가면서 말이다. 카메라가 그들의 말과 마음의 간격을 좁히고자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은 점이 좋았다. 욕망하는 정치인, 호소하는 정치인, 아파하는 정치인, 일하는 정치인을 연출하는 것이 아닌, 욕심도 있는 인간, 호소할 줄 아는 인간, 아파도 하는 인간, 일해야 되는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따라 걷는다. 이 점은 영화가 두 축으로 세운 노무현과 백무현의 인간적인 모습에서 기인한 동시에 그 인물을 다루는 방식의 진정성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이 ‘무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관객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이루는 두 축이 노무현과 백무현의 총선 도전기라면, 다른 한 축은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자 김원명 작가를 시작으로 그의 지인들, 팟캐스트 ‘이이제이’ 출연진들의 술자리 대화들이 영화 중간 중간 삽입 된다.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술자리 영상은 사실 영화의 주된 내용인 2000년의 노무현 총선 도전기와는 상관없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격인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록 그들이 노무현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주로 피력하고 있다고 한들)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돕는다는 장점이 있다.





두 무현, 두 도시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이 영화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단독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에 크게 기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세 번째 축도 오직 노무현을 향해 집중되어 있으며, 고 백무현 화백조차 노무현과의 만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 영화에 등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고 백무현 화백의 정치 입문과 총선 준비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던 관객들은 조금 아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더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다는 점을 관객도 알 것이라는 점을 견지한 채로 달리는 듯하다. 노무현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백무현이라는 사람도 노무현의 정신을 잇고자 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두 도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가 노무현을 기억하는 독창적인 시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채워지지 못했지만, 두 무현의 이야기를 나눴기에 두 배의 열정을 기억하게 해줬다는 점에서는 ‘두 도시 이야기’가 할 일을 했다고 본다.


아파트 단지 유세 중 ‘부산 갈매기’의 가사를 까먹어 가사 다 떼고 오겠다고 멋쩍게 마이크를 내려놓은 노무현은 총선 패배 후 해단식에서 목청껏 부산 갈매기를 완창 한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파이널 컷>에서 수 십 개의 에피소드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당장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는 부산 갈매기이다. 작고 분명하게 시작하고 싶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열정에 끌려버린 사람이 차근차근 잊고 있던 불씨를 되살려낼 방법이라고 믿는다. 잊은 것들을 위한 기억, 그 기억에 대한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파이널 컷>과 가을을 시작할 수 있음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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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기한줄 관람평


이지윤 | 풍경만으로도 참 곱고 풋풋하다

박범수 | 섬세하게 재구성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

조휴연 | 원작과 해석 사이, 치열한 고민 끝에 제작진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순수한 감정들

이가영 | 우리의 추억으로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김신 | 여러 의미에서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현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척도를 제공한다

남선우 | 오래 펼치지 않았던 동화책을 찾아 읽는 기분으로





 <소나기> 리뷰: 섬세하게 재구성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범수 님의 글입니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소년 소녀의 애틋한 이야기를 어떻게 스크린에 옮길 것인가? 안재훈 감독의 중편 애니메이션 <소나기>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우직한 정공법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 보면, 동시대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는 손길이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소나기>는 원작의 평이한 답습이 아닌, 섬세하게 재구성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불릴만하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내용이겠지만, 영화의 줄거리(이자 소설의 줄거리)를 한 번 간략하게 옮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소년은 등굣길 징검다리에서 윤 초시네 증손녀를 만난다. 하루는 소녀가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소년에게 돌멩이를 던진다. 소년의 무덤덤함에 괜히 새침해진 것이다. 며칠간 나타나지 않던 소녀는 다시 개울가에 나타난다. 대뜸 비단조개의 이름을 묻는 소녀에게 이끌려 소년은 산 너머로 향한다. 논밭과 무 밭을 지나 산자락에 다다른 소년과 소녀는 꽃줄기를 따고 송아지를 타고 놀다가 소나기를 맞는다. 둘은 원두막에서 간신히 비를 피한 뒤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지만, 병약한 소녀는 앓아 눕고 만다. 며칠이 지나고 소녀는 개울가에 다시 나타난다. 스웨터에 든 물이 징검다리에서 업혔을 때 옮은 것이라고 말하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이사 갈 소녀에게 줄 호두를 따 온 소년은 깜빡 잠이 들었다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듣게 된다. 여러 날을 앓던 소녀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거든 입은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



<소나기>와 원작 소설의 차이를 짚어내기 위해 줄거리 요약을 옮겨 놓았다. <소나기>가 원작에서 덜어낸 것은 간결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스민 어떤 서늘함이다. 가세가 기울어 이곳 저곳을 떠돌아야 할 소녀의 비극적 운명이나 소녀의 유언을 전하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은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영화 속 소년과 소녀의 감정 또한 첫 만남의 설렘이 주는 미묘한 긴장에 보다 집중하는 듯 하다. 감정묘사 대신 행동묘사에 집중한 소설의 문체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틀 안에서 짧은 대화와 행동만으로 숨겨진 뉘앙스들을 오롯이 표현하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덜어낸 부분을 영화가 어떻게 채워 나갔는지에 대한 대답이 나올 차례다. <소나기>는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원작과 완전히 다른 감상을 요구한다. 소설에서 생략되고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들은 공간적 배경이 되는 시골의 정경이다. 밥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정겨운 오두막집, 추수를 앞둔 황금빛 들녘, 징검다리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이미지들은 그 예다. 보라빛깔의 도라지 꽃이나 빗물을 머금은 푸르른 녹음처럼 소설에 직접 등장한 것들도 한층 더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시각적 묘사들의 섬세함을 상찬하는 것만으로는 <소나기>가 전하는 감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 교정에 울려 퍼지는 풍금 소리와 송아지 치는 농부가 튼 상투는 어쩌면 그 설명을 위한 숨겨진 단서일 지도 모른다. 풍금과 상투는 영화의 시간적 배경과 어울리는 지가 다소 불분명하지만, 2010년대를 사는 도시민들이 시골의 느낌을 명징하게 환기하는 데에는 더없이 적절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소나기>는 시골에 얽힌 우리의 어렴풋한 기억들을 환기하면서 그 안에 담긴 감성을 함께 불러낸다. 그 감성이란 때묻지 않은 순수에 대한 그리움이다. 수채화풍으로 묘사된 시골 정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색감이나 구도의 문제가 아닌, 그 아름다운 풍경이 소년 소녀의 이야기와 맞닿으면서 우리 내면의 잃어버린 무언가를 환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한 표현일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나기>는 원작과 많은 부분에서 닮았지만, 그 무게에 과하게 억눌리지 않고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신만의 길을 발견해 내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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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한줄 관람평


이지윤 | 누군가의 소박한 일상으로 개발의 민낯을 이야기하다

박범수 | 잊혀져 가던 사람들, 카메라 너머의 기록과 역사를 응시하다

조휴연 | 아직 사람이 산다

이가영 | 흘러가는 강물 속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일

김신 | 사주팔자보다 강렬하게 밀려오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풍랑. 소멸의 예감 앞에 선 절박한 침묵과 움직임이 빚어낸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

남선우 | 보지 않았던 것들을 비로소 바라볼 때의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아직 사람이 산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휴연 님의 글입니다.



할머니가 경고장을 들고 눈앞에서 흔들어대도, 시장은 도개교 개통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과 악수하기 바쁘다. 자꾸 경호원들 사이로 피해 다니며 숨는다. “저 다리 올라가는 거 봐야 되는데” 서병수 부산시장은 배남식 할머니의 외침을 짐짓 외면하며 말한다. ‘다리 올라가는 거’를 다 보고 나서 시장은 바쁘게 점집을 지나쳐 사라진다. 부산 중구와 영도구 사이에는 오래된 도개교가 있다. ‘영도대교’라 불리는 이 다리는 1931년 착공해 1934년 준공되어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보급 및 수송로 역할을 했다. ‘한국 최초의 연륙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도대교는 2013년 도개 기능을 복원해 새롭게 개통되었다. 





부산과 영도를 잇는 다리가 생긴 그 때부터, 일제가 패망한 뒤 한국전쟁이 한반도 전체를 고통스럽게 할 때,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화두였을 때, 영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제주에서 올라온 사람, 전쟁을 피해 위에서 내려온 사람, 원래 영도에 살던 사람들. 가족과 떨어져서, 혹은 혼자 가족을 책임져야 할,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던 부산 사람들은 영도대교 밑으로 갔다. ‘점바치 골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 자기 인생이 언제쯤 풀릴지 알려주는 이들이 있었다. 묻고 대답하며, 위로해주고 위로받으며 영도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오늘 영도를 바라보는 누군가에겐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래된 건물들과 낡은 골목만 보인다. 이 사람들은 건물을 새로 올리고 길을 닦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영도를 구경할 곳으로 만드는 게 활성화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점바치 골목에 두 개만 남은 점집도 이들에게는 눈엣가시다. 강해춘 할머니의 바닷가 일터는 지저분해 보일 뿐이다. 활성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영도는 갈아엎어야 할 낡은 섬이다. 그렇게 용접공 권민기 씨의 일터가 사라졌고, 강아지 할머니 방에는 ‘이사 가는 날’이 적힌 달력만 남았다. 해녀 할머니의 공간은 굴삭기가 헤집었다. 배남식 할머니의 점집 또한 결국 사라졌고 그 자리엔 운세 자판기가 남았다. ‘활성화’가 지나간 자리를 카메라가 비춘다. 영도를 만들어 온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사람이 사라지는 것까지 활성화의 일환이었나, 그렇게 생각될 정도였다. 새 영도대교 앞엔 사라진 점바치 거리 대신 ‘유라리 광장’이라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는, 운세 자판기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영도대교가 도개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관광객들뿐이다.





하지만 영도에는 아직 사람이 산다. 배남식 할머니는 운세 자판기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노상으로 점을 본다. 용접공이었던 권민기 씨는 환경미화원으로 먹고살며 바닷가에 나가 때때로 색소폰을 분다. 강아지 할머니와 해녀인 강해춘 할머니의 경우 어디로 갔는지 영화 안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바뀐 영도처럼 ‘활성화’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앞서 언급한대로 시장은 계속되어야 할 영도 사람들의 삶보다는 ‘다리 올라가는 거’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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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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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리뷰: 못난이들이 던진 작은 돌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대한 님의 글입니다.



‘밤섬해적단’의 못난이들은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한국 현대사의 레드 콤플렉스 앞에 마주선다. 그들은 ‘메탈’과 ‘반어’라는 무기를 등에 지고 레드 콤플렉스에 작은 돌을 던진다. 정윤석 감독은 그러한 밤섬해적단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담았고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밤섬해적단의 행동과 그들의 음악은 정신이 나간 것만 같다. 그들의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혼란스러웠고 미친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영화를 봤던 첫날밤, 밤섬해적단을 다양성의 범주에서 인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다음 날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극장에 찾았다. 다시 이 영화를 봤을 때 무섭게도 그들에게 설득당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밤섬해적단의 모습을 보면서 웃기 시작했고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과 방향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과 행동의 목적성에 의문을 가지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왜 그토록 시끄럽게, 북한이라는 예민한 소재의 가사로 음악을 만드는 것인가?



그들은 아주 시끄러운 음악으로 북한을 가지고 놀며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 또한 레드 콤플렉스를 건드리면서 과거의 정부들을 자극한다. 그들의 자극은 국가의 심기를 건드렸고 박정근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한다. 사건이 일어난 초기, 국내 언론을 비롯해 해외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건은 어느새 잊혀졌다. 결국 밤섬해적단이 한국 현대사의 레드 콤플렉스를 향해 던진 작은 돌은 조그마한 흠집만 남기고 잊히고 있었다.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라는 영화가 만들어졌고 이 영화는 해외 영화제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난 8월 24일 개봉했다. 과거 밤섬해적단이 던진 작은 돌은 지금 조금 더 커졌다. 큰 균열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레드 콤플렉스를 돌파하는 작은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북한에 열광하는 반공주의자, 단순한 미친놈들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고 세상을 부수어나가는 밤섬해적단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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